모든 경기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다
윌리 메이스 Willie Mays는 20대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을 당시 그 분위기에 완전히 짓눌려 버렸다.
1951년, 뉴욕 자이언츠에 스카우트돼 마이너 리그에서 메이저 리그로 갓 올라온 메이스는 당시 자이언츠팀의 매니저였던 레오 듀로처 Leo Durocher에게 주눅든 모습으로 고백했다. “전 이렇게 큰 경기에서 공을 던질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듀로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메이스에게는 투수보다는 중견수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메이스의 초반 성적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첫 출전 이후 26타석 1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듀로처는 메이스가 경기 후 라커룸에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메이스는 지난 2000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그때를 회상했다. “그날 레오에게 나를 마이너로 돌려보내라고, 나는 메이저 리그에서 제대로 안타를 칠 자신도 없는데 너무 일찍 메이저 리그에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듀로처는 메이스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게임만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듀로처는 그를 격려했다. “내가 이 팀의 매니저인 이상 윌리 자넨 계속 중견수를 맡을 걸세. 자넨 내가 본 선수 가운데 최고야.”
메이스는 “그날 레오가 건네 준 몇 마디 덕분에 나도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너는 내 중견수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를 안심시켰다”라고 덧붙였다.
그 뒤 메이스는 24타석 9안타의 기록으로 메이저 리그에 안착했다. 1951년 말에는 내셔널 리그 신인선수로도 뽑혔고, 은퇴할 때까지 홈런 660개를 때려 역대 홈런 랭킹 3위에 올랐으며, 통산 3,283 안타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1979년에는 프로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1999년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의 선수들을 선정하는 ‘올 센트리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듀로처는 1975년에 쓴 자서전 『멋진 사람은 오래간다 Nice Guy Finish Last』에서 “메이스는 우리 시대 다시 없을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했다.
꾸준히 그리고 멈추지 말고 가라
메이스의 성공비결을 꼽는다면 한결같다는 것이다. 메이스는 “나는 그저 매일같이 시합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1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이라는 점이 중요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듀로처도 “그는 병이 나거나 부상을 당해도 시합과 연습을 멈춘 적이 없다. 그저 매일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가 경기를 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메이스는 1931년 앨라배마주 웨스트필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격한 직업윤리를 가르쳤다. 메이스의 아버지는 거의 프로 수준의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 야구선수이자 철공소 직원이었으며, 아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내가 방앗간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항상 그런 곳에서 일해봐야 돈 벌기는 틀린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셨다. 그러나 어쨌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시며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다.”
메이스의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에게 야구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메이스가 야구에 흥미를 보이자 아들에게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격려했다. 어린 시절 메이스는 한마디로 야구선수로는 팔방미인이었다. 짧고 날카로운 단타, 호쾌한 장타, 투구력과 빠른 주력 등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메이스는 이런 재능이 아버지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아비지는 최고의 프로선수가 되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남들이 하는 분야를 모두 한 번씩은 겪어 봐야 하고 딱 한 가지 특기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장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메이스는 최고의 선수들이 하는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유명한 도루주자인 재키 로빈슨 Jackie Robinson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장타자들은 대개 발이 느린 게 고질적인 단점인데, 로빈슨 덕분에 그걸 극복하게 됐다.” 실제로 내셔널 리그에서 1956~1959년까지 활약하며 메이스는 4년 연속 도루왕이 되기도 했다. “나는 모든 분야에서 조금씩 솜씨를 익히면서 배운 것을 스스로에게 접목시켰다.”
1951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메이스는 1952년과 1953년을 군복무로 보낸 뒤 1954년 돌아와 내셔널 리그 최고선수상(MVP)을 타며 화려한 복귀신고를 했다. 하지만 메이스에게는 이런 영광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지 그저 변함없이 경기에만 몰두했다. 겨울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겨울 리그를 뛰었고 거기서 훗날 유명한 메이저 리거가 된 로베르토 클레멘테 Roberto Clemente를 교육하기도 했다.
“프로선수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1954년과 1965년, MVP에 선정됐을 때에도 나는 아직도 갈고 닦을 것이 많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맥신 버거 Maxine Berger와 공동집필한 ‘플레이 볼 Play Ball에서 그는 MVP에 선정될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소개했다.
팀을 위해 하나가 되라
메이스도 “온 힘을 기울여 시합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듯이, 혼신을 다하는 메이스의 플레이는 팀내 다른 선수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팀의 젊은 선수들은 메이스의 태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는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주장이 되었다.
메이스의 가장 큰 장점은 팀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그것에서 최고가 된다는 점이다. 1954년, 메이스는 베이브 루스Babe Ruth가 세운 한 시즌 최고 홈런기록인 60개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메이스는 99게임을 치른 뒤 홈런 36개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듀로처가 놀라운 제의를 했다. “집에 가서 좀 쉬도록 하지?” 당시 자이언츠는 두 게임 차로 리그 2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메이스가 주로 주자가 없을 때 홈런을 날리는 바람에 추가점수를 내지 못한다는 게 단점이었다. 결국 메이스는 팀을 위해 홈런이 아닌 안타로 출루한 다음 도루를 해서 후위타자들이 타점을 내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메이스는 홈런보다는 중거리 안타로 출루했고 결국 그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추가한 홈런은 다섯 개뿐이었다. 그러나 타율은 3할1푼6리에서 3할4푼 5리로 올랐고 팀은 내셔널 리그에서 1위를 했다. 그해 자이언츠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메이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은 내 홈런기록 같은 개인적인 실적보다 중요했다”며 “내가 야구를 하는 건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메이스가 훗날 “공이 맞으면 무조건 뛰어 나가야 한다”고 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적극적인 선수인지 알 수 있다.
1954년 자이언츠의 폴로 구장에서 벌어진 월드 시리즈, 8회 2대 2동점 상황에서 클리블랜드는 1루와 2루에 주자가 나가 있었다. 클리블랜드의 빅 워츠vic Wertz가 친 공이 메이스 앞으로 날아들었다. 메이스는 날아오는 공을 뒷걸음질쳐서 잡은 뒤 홈플레이트까지 무려 450피트(약 137미터)를 던지는 괴력을 보였다. 2루에 있던 클리블랜드 주자는 3루에서 멈춰야 했고 결국 자이언츠는 그날 경기를 5대 2로 이겼다.
“공을 잡으면 던지기 전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해야 한다. 나는 공을 잡는 순간 클리블랜드가 추가 득점을 노릴 것이고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이스는 상대 투수를 제압하는 것은 물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법까지 깨닫고 있었다. 그는 “시합 전에 이미 타격은 시작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날의 투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8~1960년까지 자이언츠 매니저였던 빌 리그니 Bill Rigney는 “메이스는 이미 투수가 자신에게 어떤 플레이를 해올지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타고난 신체적 재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메이스는 자기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올바른 식생활을 유지했고 술과 담배도 멀리했다. “나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지 않는 것을 한 번도 용납하지 않았다. 야구를 하면서도 적어도 내가 어떻게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이상 항상 정도를 걸으려고 했고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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